

홍익학당 윤홍식의 ‘청정경’ 강의를 정리한 것으로, 우주의 근원인 태극과 인간의 참나가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설명합니다. 저자는 만물의 뿌리인 **도(道)가 맑음(淸)과 고요함(靜)**이라는 음양의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이를 체득하는 것이 명상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시공간과 주객의 구분을 내려놓는 ‘모른다’는 수행을 통해 에고를 넘어선 순수한 의식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강의에 따르면 마음속 욕망을 잠재울 때 비로소 신성한 지혜가 드러나며, 이때 안팎의 모든 현상이 **본래 텅 비어 있음(空)**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 글은 개인이 맑고 고요한 본성을 회복함으로써 대우주의 질서와 합일되는 구체적인 원리와 실천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생각과 욕망, 외부의 압박 속에서 내면의 평화를 잃고 길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현대인의 삶은 종종 이러한 정신적 소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요한 중심을 잃어버린 채, 우리는 끝없이 밖으로만 무언가를 찾아 헤맵니다. 여기에 수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우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놀랍도록 명확한 길을 제시하는 고대 도교 경전이 있습니다. 바로 청정경(淸靜經)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이 고전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의외의 통찰 몇 가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주의 ‘참나’와 나의 ‘참나’는 하나다
우주의 근원, 즉 이 세상 모든 것을 낳은 궁극적인 실체를 도교에서는 태극(太極)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순수한 의식, 진정한 자아를 참나(眞我)라고 합니다. 청정경의 핵심 가르침은 이 둘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한 의식과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의식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힌두 철학의 개념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우주적 영혼인 브라만(Brahman)이 바로 태극에 해당하고, 개별적 영혼인 아트만(Atman)이 참나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신성(神性) 자체가 시간과 공간(시공), 주체와 객체(주객)와 같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이분법적 구분을 초월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분리가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나의 신’과 ‘우주의 신’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소우주의 신인 ‘아트만’과 대우주의 신인 ‘브라만’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것은 애초에 음양의 현상에 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이건 우주의 신이건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참나를 만나는 가장 단순한 비결: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우주적 자아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청정경 강의는 놀랍도록 실용적이고 역설적인 명상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구절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구축하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들, 즉 시간, 공간, 그리고 자아와 타인이라는 구분에 대한 판단을 의식적으로 유보하는 수행입니다.
수행법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누군가 “지금 몇 시입니까?”라고 물으면, 마음속으로 “모르겠다”라고 답하며 시간에 대한 개념을 내려놓습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라고 물으면, “모르겠다”라고 답하며 공간에 대한 분별을 멈춥니다. 나를 중심으로 앞뒤, 좌우를 구분하려는 습관을 멈추고 “앞인지 뒤인지 모르겠다”고 해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름’의 실천은 우리를 분리된 개체로 느끼게 만드는 정신적 장벽들을 적극적으로 녹여내는 과정입니다. 시간과 공간,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주와 하나 된 느낌을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참나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에고는 죽여야 할 적이 아니다
많은 영적 가르침은 “에고를 죽여라”는 폭력적인 조언을 건네며 우리 내면을 전쟁터로 만듭니다. 하지만 청정경은 이러한 내적 투쟁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내면의 조화라는 훨씬 더 자비롭고 근본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이는 영적 수행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심오한 전환입니다.
청정경의 섬세한 시각에 따르면, 우리의 진정한 자아(영, 신)는 본래 하늘처럼 맑고(청) 팽창하는 양(陽)의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 생각과 감정의 주체인 마음, 즉 에고(마음, 혼)는 본래 땅처럼 고요하고(정) 수축하는 음(陰)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에고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마음의 본래적 고요함을 뒤흔드는 ‘욕망(慾望)’입니다. 에고는 본래 고요함을 추구하지만, 끝없는 욕망이 이 마음을 사방으로 끌고 다니며 혼란을 야기합니다. 따라서 목표는 에고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잘 다스려 마음이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맑은 참나의 빛이 고요한 마음의 터전 위에서 온전히 빛나며, 내면의 완벽한 조화(청정)가 이루어집니다.
참나는 맑기를 원하고, 마음(에고)은 고요하기를 원합니다. 욕망으로 마음을 휘저지만 않으면, 마음은 본래 고요한 쪽으로 갑니다.
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한다 (無爲)
우주가 작동하는 원리는 무위(無爲), 즉 ‘함이 없는 함’입니다. 이는 도(道)의 방식입니다. 강의에서는 수정란이 세포 분열을 하는 비유를 듭니다. 수많은 동일한 세포들이 분열하며 어떤 것은 눈이 되고 어떤 것은 발이 됩니다. 이 과정에는 눈에 보이는 사령관이나 지시가 없지만, 모든 세포는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질서와 지성이 바로 도의 작용입니다.
이는 힘과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는 인간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이 무위의 지성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마음이 기대하는 직선적인 인과율(인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현상계의 법칙을 초월하여 작용하기에 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조작의 흔적이 없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무위의 지성이 우리 안에서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참나와 연결될 때, 우리의 몸과 감정은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조절하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찾아갑니다. 예를 들어, 극심한 분노가 저절로 자비심으로 변형되거나, 복잡한 문제에 대한 지혜로운 해결책이 떠오르는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론: 해답은 이미 당신 안에 있습니다
청정경의 지혜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깊은 진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주와 하나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름’의 상태에서 가장 깊은 자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에고는 싸워 없앨 대상이 아니라 조화롭게 다스려야 할 파트너이며, 우리 내면에는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무위의 지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우주를 운행하는 고요하고 맑은 지성이 이미 당신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면,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아닐까요?”
